해외 출장을 갈 때 갈아입을 속옷이나 양말보다 더 중요하게 챙기는 것이 있다. 바로 사전이다. 소형 콘사이스(영어사전)와 옥편을 언제나 가지고 다닌다. 늘 지니고 있는 수첩에는 사자성어를 몇 페이지에 걸쳐서 빼곡하게 적어 가지고 다닌다.
‘삼엄한 분위기’, ‘삼엄한 경비’ 해서 삼엄하다는 표현을 익숙하게 입에 올리는데, 한 번은 ‘삼엄’의 ‘삼’자에 무슨 삼자를 쓰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마침 그때 중국 다롄에서 직원들과 아침을 먹던 시간이어서 그들에게 우선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내 질문에 난처한 얼굴을 할 뿐, 누구도 답을 주지 못했다.
나는 한 번 궁금한 것이 생기면 답을 알아내기까지 답답함을 참지 못한다. 지방 공장을 향해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 있던 가방에서 옥편이나 콘사이스를 꺼내어 찾아보기까지 할 정도다.
그 날도 바로 옥편을 찾아 삼엄하다고 할 때는 ‘나무 목(木)’자 세 개를 쓰는, 수풀을 뜻하는 ‘삼(森)’자라는 것을 알아냈다. ‘인적 없이 울울창창한 산중의 엄숙함을 이르러 삼엄이라 하는가? 내 나이 팔십을 훌쩍 넘기고도 오늘 새로운 것 또 하나를 배웠구나!’
2007년 <머니투데이>라는 경제지에서 나에게 ‘아름다운 경영인대상’이라는 것을 수여했다. 나는 극구 사양했지만 사장까지 찾아와 수상을 권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받았다. 그런데 그 대상을 ‘그랑프리’라고 흔히 부르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쓰는지 궁금했다. 영어로 하면 ‘그랜드 프라이즈(Grand Prize)’라고 해야 맞을 텐데 왜 ‘그랑프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옆에 간부들에게 물어 보니 프랑스 말에서 온 것이라서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곧장 사전을 꺼내 보았다. ‘Grand Prix’의 발음이 그랑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 느끼는 그 짧은 개운함이 좋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을지 모르지만 나이 들어도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단어 하나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공장 기계에 관한 복잡한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공장 기계의 제원과 성능, 운영 방법과 고장수리 방법 등에 관해 나만큼 아는 기술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나는 철저하다. 나는 경영인이니까 기술은 몰라도 된다고 하는 경영인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자신의 오감을 통해 흡수한 모든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평소 보고, 읽고, 듣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넘겨서는 발전할 수 없다.
국내는 물론 세계 어디를 가든 나는 그 나라나 지역에 대해 미리 공부를 하고 간다. 그렇지 않고 바쁜 시간에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여행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미리 공부해서 이것이 어떤 것인지 직접 확인하면서 보면 훨씬 효율적이다. 흔히들 ‘보는 것만큼 안다’고 해서 관광도 하고 산업 시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가 맞다.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을 보여 주어도 모른다.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도 볼 수 있다.
유럽 방문길에 베네치아를 여행한 적이 있다. 일반 사람들은 수상(水上) 도시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곤돌라도 타 보고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는 것으로도 만족해 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베네치아가 123개의 섬을 다리로 연결해서 이뤄진 도시라는 것을 미리 알고 바다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 그 느낌이 훨씬 달라진다.
또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Venice)>을 되새기면서 그곳의 상가를 거닐어 보면 셰익스피어 시대의 베네치아에 와 있는 듯한 감회에 젖을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한 <군주론 Il principe>을 상기하면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무덤을 찾아보면 여행의 묘미는 더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123개의 다리로 연결된 것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파시즘을 주창한 독재자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가 메인 브리지를 건설하고 그 다리 이름을 ‘자유의 다리’라고 명명했다는 것까지 알아본다. 그리고 이것이 자유와는 정반대의 사람이 마치 자기가 자유의 화신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선전술이었다는 것을 간파한다. ‘오늘의 세계에서도 많이 보이는 그러한 선전. 홍보 기법도 바로 이런 데서 나온 것이구나’ 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세상을 다시 보는 눈이 뜨인다.
특히 <군주론>을 제대로 읽고,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의 <로마인이야기>를 섭렵하고 베네치아를 보면 베네치아가 또 다르게 보인다. 마키아벨리가 왜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를 이상형 군주로 상정했고, 시오노 나나미는 그것을 어떻게 극적으로 묘사했는지 알고 보면 더욱 그렇다.
보르자는 15세기 이탈리아의 분열을 막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대화와 협상을 하자면서 자기에게 반대하는 군주들을 궁중으로 정중히 초청했다. 만찬 시작과 함께 축배를 드는 순간 만찬장 뒤 장막에 숨어 있던 보르자의 경호원들이 반발하는 군주들의 목을 다 날려 버렸다. 이 장면을 지켜본 마키아벨리는 감탄했다. 통일을 위해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무릎을 쳤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를 이상형 군주로 상정한 것이라고 시오노나나미는 쓰고 있다.
이런 것까지 알고 체사레 보르자와 마키아벨리의 무덤을 바라보면 베네치아 여행의 깊이는 극치에 달한다. 따라서 나는 ‘보는 것만큼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출장이나 관광이 따로 있나? 집 떠나 길을 나서면 그게 출장이고 관광이다. 나는 여기에 대비해서 늘 틈나는 대로 공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려고 힘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