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내가 태어난 해는 1923년(4월 10일 : 음력)이었다. 나의 선친은 영(英)자 재(載)자를 쓰고 계셨고, 모친의 함자는 성이 한(韓) 가(家)에 정(丁)자 수(樹)자였다. 어린 시절 나는 조부님의 사랑채에서 같이 생활했는데, 조부님의 함자는 용(容)자 수(修)자이시다. 조모님은 성이 노(盧) 가(家)였다는 것밖에 모른다.
또 나보다 일곱 살 많은 형이 있었는데 형은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형은 불행히도 18살(당시 내 나이 11살)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내가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井洞里)로 예로부터 우물물이 좋다고 해서 우무실 마을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우무실 마을은 웃골과 아랫골 두 군데로 나뉘어 각각 10여 채의 가옥이 들어서 있었다. 우리 집은 그 중 웃골에 있었다.
바쁜 일정 중에 어렵사리 짬을 내어 고향으로 향할 때면 새로 놓인 널찍한 정암다리를 건넌다. 부산과 광주를 오가는 남해고속도로 중 군북 인터체인지로 나와 잠시 달리다 보면 멀리 자굴산이 보이고 남강을 가로지르는 정암다리에 이른다. 그 아래로 흐르는 남강은 15킬로미터쯤 더 내려가 낙동강과 만난다. 내 고향 의령의 관문이다.
의령읍으로 들어서면서 낡은 정암다리가 보이는데 이곳을 지날 때면 다리 개통식 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에 건너다니던 정암다리는 이제 역사의 유물로만 남았다. 그저 사람들이 걸어 다니며 남강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 장소로 쓰일 뿐이다. 그리고 여러 해 전에 현대식 새 정암다리가 개통되어 정든 정암다리와 세대교체를 했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내가 열세 살 때 정암다리 개통식이 있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 소학교 6학년 학생들은 남녀 2개 조로 나뉘어 개통식에 참석하였고 군수, 도의원, 마을 유지들과 함께 다리를 건넜다. 내가 남학생 맨 앞에 서서 그 다리를 건넜다.
내가 소학교 4학년 때까지는 집에서 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학교에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걸어서 통학했다. 그 시절 그 정도 거리는 걸어서 통학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형이 세상을 뜨고 내가 5학년이 되었을 때 의령 읍내에 있는 의령소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마을에 있던 소학교는 4학년까지만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하나밖에 안 남은 아들을 위해 학교 근처에 하숙집을 얻어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선생님 한 분을 모셔서 내 학업을 돌보게 하셨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과외수업을 시킨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쌀 한두 말로 사례를 하시는 듯했다.
나는 토요일이 되면 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갔다. 한여름에 홍수가 나면 하숙집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 물에 잠기곤 했다. 나는 홀딱 벗고 헤엄을 쳐서 물을 건넜다. 요새도 시제(時祭)를 모시러 고향에 들르다 그 근처를 지날 때면 혼자 옛 추억에 잠기곤 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옛 생각이 날 때면 부모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아버지는 한학(漢學)을 하신 시골 선비면서 농사일을 직접 관리하셨다. 그리고 엄하셨다. 남보다 스스로에게 더 엄하셨다. 특히 부지런하셨다. 일꾼들보다 먼저 일어나시고 제일 늦게 일을 마치셨다. 농사일을 일꾼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함께 앞장서서 하신 것이다. 그러니 일꾼들이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혹사를 시키는 법도 없었다. 당신이 견딜 만한 정도만 일꾼들에게도 일을 시키셨다. 그리고 일을 착실하게 잘하는 일꾼은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그러니까 모두 더욱 성심껏 자기 일처럼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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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의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맨 앞줄 가운데 앉은 교장 선생님 바로 뒤의 학생이 필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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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방학 때 집에 오면 농사일을 거들게 하셨다. 그래야만 농사가 뭔지, 쌀 한 톨을 생산하는 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신 것 같았다. 정말 아버지는 일밖에 몰랐다. 아버지가 수백 석을 헤아리는 지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근면성 덕분이다.
아버지는 어느 날 장성한 나에게 당신이 일군 농토를 넘겨주셨다. 그러나 1949년 실시한 토지개혁으로, 그것은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아버지에게서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꼴이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땅을 물려받은 것보다, 부지런하게, 그리고 열성적으로 일하면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교훈을 아버지께서 손수 보여주셨다는 사실이 훨씬 소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께서는 특히 “일 많이 한다고 일찍 죽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부지런히 일을 많이 할수록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뜻이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상속 받은 가장 값진 것이 바로 ‘근면과 절약’이다. 내가 천재도 아니면서 맨주먹으로 오늘날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도 부지런함 때문이다. 고향 땅에 들어서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 ‘근면과 절약’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되새기곤 한다.
또 어머니의 온화한 얼굴이 떠오른다. 어머니께서는 내게 늘 정직과 베풂과 용서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너그러움과 베풂을 몸소 보여주셨다. 이웃에서도 모두 어머니를 좋아하고 우러러보았다. 소학교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 안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보였다. 마루에 쌀자루를 놓고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내 친구의 어머니였는데, 친구도 곁에 서 있었다.
“그냥 갖고 가셔요.”
“그냥 갖고 갈 수는 없어요.”
“제가 드린 걸로 하면 되잖아요?”
“아드님이 어머니 몰래 준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살아도 훔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받을 수는 없어요.”
두 분은 서로 조금도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