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차지철 경호 실장은 문제의 인물이었다.
1979년 가을 어느 날 김재규 중정부장이 나에게 점심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장소는 일반 식당이 아니라 청와대 옆 ‘안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안가는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난 안가가 아니라 그 옆 중앙정보부장이 집무하는 작은 안가였던 것 같다.
그 자리에서 김재규 중정부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차지철이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어요. 그가 모든 일을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여간 큰일이 아니오.”
김재규 부장은 차지철의 이러한 횡포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박 대통령이 이러한 차지철 실장을 김재규 부장보다 훨씬 편애하는 데 그 심각성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때 국회 발언에 대한 청와대의 반응에 큰 실망을 했다. 의리상 공화당을 떠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민심과 함께 그 때 이미 당을 떠나 있었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다.
5월로 들어서자 사회는 극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농촌의 피폐로 이농(離農) 현상이 심각해지기 시작한 데다, 주요 산유국들이 원유 공급 감축을 단행해 국내 에너지 문제가 크게 대두됐다.
5월 30일에는 신민당의 새 총재로 김영삼 씨가 당선되었다. 이는 중요한 변수였다. 즉 강경 야당의 출범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영삼 총재가 6월 11일 취임 첫 외신기자클럽 연설에서 김일성(金日成)과 면담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면서 정국은 극도로 혼란해졌다. 북한에서는 18일 김일(金一) 부주석의 이름으로 김영삼 총재의 제안에 동의하면서 판문점이나 제3국에서 예비 접촉을 갖자고 제의해 왔다.
사태가 여기까지 진전되자, 상이군경 120여 명이 신민당사에 난입하는 등 소란한 가운데 29일에는 카터 미국 대통령이 내한(來韓)했다.
카터 대통령의 방한 덕분인지 7월에는 정국이 다소 잠잠하였으나 8월 11일 ‘YH사건’ 으로 또다시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기업주의 폐업 조치에 반발해 마포 신민당사에서 철야농성을 벌이다 172명의 여성 근로자들을 경찰이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여공(女工) 1명이 투신해 사망하고, 신민당 대변인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이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새벽 2시에 1천여 명의 경찰이 동원돼 여공들을 끌어내는 장면을 TV뉴스로 본 내 마음은 착잡했다. 성급하게 경찰을 동원한 게 오히려 사건을 확대시켰던 것이다. 더구나 죽은 김경숙(金景淑) 양은 겨우 스물한 살의 꽃다운 나이인데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박봉을 쪼게 남동생의 학비를 대주던 효녀였다는 사실을 듣고는 더욱 가믓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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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기사는 YH사태 당시 경찰의 강경진압 당시 투신한 김경숙열사의 10주기 기사이다. 김경숙은 광주에서 상경해 YH여공으로 근무하며 동생들의 학비를 대주던 생활을 하던 중 79년 노사 대립 당시 투신으로 저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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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꽁꽁 얼어붙고 있는 가운데 8월 13일 신민당 원외지구당위원장인 조일환(曺逸煥), 유기준(兪棋濬), 윤완중(尹完重) 씨가 ‘총재단 직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민사지법에 냈다. 조 씨 등은 김영삼 의원을 총재로 뽑은 전당대회에 대의원 자격이 없는 사람이 25명이나 참여했다면서 총재 당선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9월 8일 “총재 선출 경의 무효 확인 등 본안 소송의 판결 확정 때까지 김영삼 씨는 신민당 총재의 직무 집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한 뒤 정운갑(鄭雲甲) 전당대회 의장을 신민당 총재 직무대행으로 선임했다.
이것은 당국의 서투른 정치공작의 산물로 오히려 김영삼 씨와 신민당의 대여 투쟁 의지를 강화시켰다.
여야 간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가운데 9월 16일 김영삼 총재가 《뉴욕타임즈》와의 회견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이란과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 그리고 주한 미군을 내정 간섭으로 볼 수 없다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압력 역시 내정 간섭으로 보지 않는다. 미국은 국민과 유리된 정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국민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때가 왔다”고 한 말 때문에 정국에 다시 한 번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결국 10월 4일 국회는 김영삼 총재의 발언을 ‘용공적인 이적 행위이자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행위’라며 의원 제명을 변칙으로 통과시켜 버렸다. 그것도 신민당 의원들이 단상을 점거해 의장석에 오르지 못한 백두진 국회의장이 본회의장 출입구에서 20여 명의 경위들에게 둘러싸인 채 구두로 “김영삼 위원의 징계동의안이 발의되어 이를 법사위에 회부한다”며 순식간에 의사봉도 없이 손만 흔들어 처리한 것이었다.
이어 경호원이 발동된 가운데 본회의 장소를 146호로 옮겨 출입구와 복도를 300여 명의 사복 경찰과 50여 명의 국회 경위들이 야당 의원들의 접근을 막은 채 159명의 공화당 유정회 의원만으로 김영삼 총재 징계 안을 단 10분 만에 전격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30년 의정(議政)사상 최초의 정당 대표 제명이었고, 그것도 날치기 통과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