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내가 결정적으로 거리패들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그들이 장충공원에 가서 난동을 부린 사건이 있고 난 뒤부터였다. 당시 이정재(李丁載)는 ‘화랑동지회’를 긴급 소집하였다. 나도 그때 운동하는 대학생들과 함께 광화문 오야봉 아오마스를 따라 동대문으로 갔다.
동대문에는 150여명의 거리패들이 몰려 있었고, 유지광(柳志光)이 그들 앞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이정재는 뒤에서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먼저 유지광은 화랑동지회 소속 거리패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장충공원으로 쳐들어가자고 선동하였다. 당시 장충공원에서는 조병옥 박사를 비롯하여 김두한(金斗漢), 전진한(錢鎭漢) 등 야당 정치인들의 정견발표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 정치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이정재 거리패들이 동원된 것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생들까지 정치집회 방해공작에 동원된다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모두들 힘께나 쓴다는 운동부 출신이었지만, 그래도 대학생 신분으로 정치에까지 관여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유지광이 이끄는 거리패들이 화염병을 들고 장충공원으로 몰려 갈 때 나는 같이 간 동료 대학생들에게 말했다.
“우리 대학생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우리들은 빠져서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가자.”
내 말에 다른 대학생들도 찬동하였다.
그래서 우리 대학생들 40명은 택시 10대를 잡아타고 장충공원으로 가는 척하다가, 도중에 행선지를 바꿔 광화문으로 돌아왔다. 결국 유지광을 위시한 거리패들을 배신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보복이 두렵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당분간 광화문 황정유에 나타나지 않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일간신문 1면에는 장충공원에서 정치집회를 방해한 유지광의 조직거리패들의 난동사건이 크게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과 관련된 거리패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사건 주동자들이 구속되었기 때문일까, 그 후 우리 광화문 대학생들에게는 어떤 보복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참으로 다행스럽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시절 광화문거리패들과 어울려 다닌 것은 불타 오르는 내 열정을 다른 어떤 곳으로 분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단순히 정의 때문에 그들과 어울렸으나, 결국 정치의 이용물로 타락한 거리패들에게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지금도 내 오른쪽 이마에는 움푹 들어간 흉터가 있다. 광화문에서 벙어리 거리패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은 자국이다.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문득 그 자국을 보며 대학생 시절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벌써 오랜 세월 내 오른쪽 이마에 터를 잡고 있는 그 상처자국은 한때 샛길로 빠졌던 내 인생의 표식 같은 것이다.
젊은 시절에 생긴 이마의 상처는 나에게 뼈아픈 반성을 하게 하도록 강요했다. 나는 그 사건 이후 더 이상 샛길로 빠지지 않고 내 인생의 정도를 걸어왔다고 자부한다. 결과론이 되겠지만 내가 인생의 정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마의 상처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한때 그 상처는 나의 부끄러움이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것도 때로는 정겹게 여겨진다.
내가 더 이상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고를 해준 이마의 상처, 그것이 이제는 내게 잊지 못할 ‘훈장’처럼 느껴져 당당하게 이마를 내놓고 다니게 되었다.
거리패들의 장충공원 난동사건 이후 나는 뒤늦게 학업에 매달렸다.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하겠다고 생각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었다.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시인의 <자화상(自畵像)>이라는 시에 나오는 ‘8할이 바람’이라는 유명한 시구처럼 나에게는 대학시절의 8할이 그야말로 바람 같은 세월이었다.
바람 같은 세월을 나는 열정 하나로 버텨왔다. 나는 그 세월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빛과 어둠이 있듯이, 치기어린 젊음도 때로 삶의 어두운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일상은 낮과 밤, 즉 빛과 어둠의 교차로 반복된다. 어둠이 깊어야 새벽이 밝아오고 빛이 긴 그림자를 드리울 때 어둠이 찾아오는 것이다.
인생에는 터닝 포인트가 있다. 나는 밖으로 분출하기만 한 하던 일정을 안으로 불러들였고, 그동안 게을리 하던 공부에 몰두하면서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아마 거리패들의 장충공원 난동 사건이 없었더라면 나는 계속 바람의 세월 속에 내 젊음을 무작정 걸어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잡자 곧바로 졸업시기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