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반부터 대구의 문학도들은 이 <녹향>을 중심으로 모여서 음악감상을 하고, 문학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남녀 간의 로맨스가 어우러지는 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나는 친구 김원중을 따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녹향음악실>에 다니게 되어 그로부터 자주 출입하게 되었다. 이처럼 <녹향>은 대구 문화의 산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화전동에 이주하여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서 많은 출혈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창업주 이창수 씨가 80노구로 직접 차를 나르며 <녹향>의 창업정신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대구 문화의 산증인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구 예술을 보존하기 위해서 대구시 문화예술국은 <녹향>과 <하이마트>를 지원하는 문화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하이마트음악실>은 1957년 5월 경 음악애호가 김수억 씨가 창업한 클래식음악실이다. 화전동 23번지에 좋은 시설로 창업한 이 음악실은 <녹향>과 더불어 대구 문화의 산역사라고 할 수 있다. 대구에서 예술을 한 사람치고 이 음악실에 출입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화여대 계정식 박사를 비롯해서 추병기, 안종배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이 음악실에서 레코드콘서트를 하셨다.
3층에 <시보네경음악실>이 있어서 클래식 음악이 지루하면 3층으로 올라가서 가벼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이 음악실의 장점이었다.
나는 <녹향>과 <하이마트>에 출입하면서 심포니에서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를 구별할 줄 아는 음악의 소양을 닦았고, 심포니와 콘체르토의 특성 및 각 음악가들의 개성을 가릴 줄 아는 청각적인 기능이 높아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김원중, 김운현, 정영진 등을 비롯해서 우리 클래스 학생들을 주로 이 두 음악실에서 만나서 예술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하이마트>를 창업한 김수억 씨가 1969년에 돌아가셔서 경영상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으나, 김수억 씨는 돌아가시면서 딸 김순희(효성여대 영문과 졸업)에게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하이마트음악실>을 계속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 따라 딸 김순희 씨는 공평동 16-2로 이전하여 상당한 적자를 보면서도 계속 음악실을 경영하고 있다. 아들이 이탈리아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전공하고 있다고 하니 앞으로 음악실은 이들의 몫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1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이후에도 김원중을 비롯해서 정일 화백, 내 이복동생 말향, 그의 친구들인 정강자 화백, 대구합창단원 백정숙, 그리고 시인 권기호, 전재수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서 음악과 철학, 예술 등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김원중과는 거의 매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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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음악감상실 <녹향>의 건물과 간판 (2010.) [출처 ; 네이버 블로그 프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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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의 정서를 김원중에게 편지글 형식으로 썼는데, 청구대학 신문에 실린 일이 있다.
K형
아인슈타인의 사랑의 공식을 다시 한 번 정의해보면 어떨까요. 이제는 2년 전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현실 앞에서 형이 세워 둔 가설(假說)은 새로이 설정되어져야 하고, 그러할 때, 내가 마음으로 부러워했던 형의 ‘황태자’는 망각 속으로 훌훌히 떠나버렸다고 형은 슬픔을 달래며 호소한 적이 있지요.
언제나 시발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회전목마의 풍경들을 눈 주고 있으면서 밀어 올려도 밀어 올려도 끝이 없는 작업을 ‘시지프’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나의 생활이라고나 할까요. 결과 없는 작업은 무의미하다고 들었지만, 성취가 없어도 과정에서의 최선의 성의는 인생의 소중한 가치가 아닐까요.
그때와 같은 푸르름의 5월이 문전에서 출렁이며 우리들에게 순환의 의미로 다가오오고 있군요. 한낮의 바쁨을 밀어낸 어스름이 어느 사이에 어두운 밤으로 덮여지고, 비좁은 국화빵집 구석자리에서 교환하던 인생의 단편들은 정말 멋있는 ‘이데아’며 감성의 승화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루의 일상이 끝나서 통금 사이렌이 어둠으로 퍼져가는 순간은 우리들의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이었고, 또 다음을 기약하는 시작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고등학교 시절 <마돈나의 침실>에 감동하여 달성공원 이상화(李相和) 시비(詩碑)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빼앗긴 들’을 찾으려 했던 형은 이제 머리끄뎅이 여고생들 앞에서 고함치기에 진땀을 빼고 나는 초등학교 코흘리개와 더불어 선전포고하기에 온 정신을 쏟고 있는 현실은 시간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K형
쇼펜하우어의 <여성론>을 누구보다도 즐겨 읽던 형의 결론은 지금쯤 어디에서 머뭇거리고 있나요? 긴 시간 방황하던 피곤한 다리를 멈추고, 희미한 가로등에 기대어 윤동주의 <자화상>과 <별 헤는 밤>을 낭독했던 우리들은 시를 쓴다는 사실에 무척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지요.
‘무도회의 초대’를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 형의 지나친 순진함과 소극적인 자세에 엉덩이라도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인생의 만남과 헤어짐은 오기(傲氣)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이치를 깨달아가고 있다는 것은 나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소월(素月)은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고 하는 참 멋있는 시구를 남기고 갔군요. 이별이란 인생의 아름다운 고뇌와 여운이라는 것을.
K형!
계절을 따라 나에게도 변화가 왔어요. 가장 흡입력이 있는 인간의 손짓이 나를 부르고 있군요.
‘하이마트음악실’에서 <소녀의 기도>를 들으면서 지금 나는 가장 짙은 마음으로 인간의 사랑을 마음 속에 용해시키고 있어요. ‘마리아’의 부드러운 손길을 가까이 사랑 속에 느끼면서 ‘상뜨스’를 외우고 있다면 실소를 금하지 못할까요.
우리들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자양>을 읽으면서 주인공 나타나엘을 무한히 동경하면서 대지에다 희망을 걸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성실한 태도가 어느 사이에 우리를 매혹시키고 있었지요.
그리고 <짜라투스트라>의 초인의 의지는 아직도 나의 가슴에 연주를 계속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따뜻한 인간의 손길과 의지할 수 있는 그리움이 샘솟고 있었어요. 소설의 주인공 엘리사의 마음을 통해서 나의 긴 여로는 끝나고 있다는 파토스적 표현을 해도 무리가 없을까요.
k형!
어두운 밤이 조용히 밀려가고 있군요. 그러나 내일 쯤은 먼 향수 짙은 여인의 엽서를 놓아두고 형은 ‘아인슈타인’의 공식을 다시 풀고 있겠지요? 그리고 새로운 해답을 앞에 두고 향촌동 골목에서 우리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사랑의 공식을 스스럼 없이 다시 한 번 논의해볼까요.
‘사랑의 공식을 위하여’ _ <청구춘추> (1963.)
이 글을 발표한 <청구춘추>에 나는 여러 편의 시와 수필, 평론을 발표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5년 선배 예종숙 선생과 논쟁을 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