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0학번으로 청구대학 야간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모집 정원은 60명인데 막상 입학하고 보니 100명이 훨씬 넘었다. 직업이 가지가지이고 학생들의 성향도 다양한 것이 야간부의 생리이다. 학생들 중 3분의 1정도는 정말 공부를 하고 싶어서 입학한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졸업장이 필요해서 대학의 낭만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클래스에는 교사, 간호사, 동장, 시청공무원, 회사원, 아나운서, 상인, 신문기자, 공군사병, 육군사병, 그밖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잇거나 직업이 없으면서 입학한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비록 일류학교에는 속하지 못했지만 학생들은 공부하고자 하는 의욕이 대단했다. 몇 분의 교수들도 학생들 의욕에 맞추어서 수업의 열기가 매우 고조되어 있었다.
입학한 얼마 후에 대의원과 평의원의 선출이 있었는데 내가 대의원이 되었다. 요즘 말하면, 대의원은 학과 학년의 대표로서 대의원회의 대의원이 되어 총학생회를 예산과 결산에 의해서 견제하는 구실을 했다.
평의원은 송문현이 선출되었다. 나는 여러 학생들을 만나서 클래스의 분위기를 공부와 친목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대학을 입학한 10여일 후 4.19학생혁명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일어난 데모는 대구에서는 4월 30일 오전에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청까지 진출한 학생들은 도지사를 만나고 해산하였는데, 청구대학의 주간학생들은 잠잠했다.
저녁이 되자 국문과, 토목과, 건축과를 비롯한 야간부 학생들이 서울에서는 모든 대학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목숨을 바쳐서 독재정권 타도와 부정선거를 성토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만이 안이하게 있을 수 없다는 강한 항의로 회의를 다시 소집하여 표결에 붙인 결과 데모를 하기로 결정했다.
신달선 학생회장은 어쩔 수 없이 앞에 나와서 “내가 앞장을 설 테니까 절대로 파괴나 저항은 하지 말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자.”고 말하고 나서 데모대열의 앞장을 섰다. 나도 대의원이기 때문에 대열을 따라갔다.
중앙통과 남대문 경찰서를 거쳐 도지사 관사에 도착할 때까지 경찰 수백 명이 우리를 에워싸고 따라왔다. 도지사 관사 앞에 오니 2군사령부에서 나온 대령과 수명의 군인들이 지금은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학생들은 귀가하라고 종용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현직교사인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나의 신분이 탄로 날 경우 자유당 독재정권에서 파면을 당하는 불이익이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지사가 지금 관사에 있지 않고 도청에 있다고 해서 학생들은 다시 대열을 정비해서 도청으로 쳐들어갈 준비를 했다. 나는 앞으로 되어 질 일을 운명에 맡기고 끝까지 참여하려고 생각했다.
도청 입구에서 경찰들과 심한 몸싸움이 있은 후 학생들은 경찰봉에 쫓겨져 흩어졌으나 다시 대열을 갖춘 학생들이 도청으로 진입하다 경찰과 충돌했고, 20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검거되고, 수명이 구속되었다. 그 중에 우리 클래스 배금원 여학생이 경찰에 성폭행을 당했다는 기사와 함께 1분위기가 점점 자유당 몰락으로 기울어져 가면서 가해 경관이 깊이 사과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나는 학과의 대의원이기 때문에 배금원 학생을 면회하러 가서 용기를 격려해주고, 대학 당국에서 그 학생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고려해주도록 주선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면서 마침내 자유당 독재정권이 몰락했다.
4.19혁명이 성공하자 대학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대구 시내 5개 대학(경북대, 계명대, 대구대, 청구대, 효성여대)이 공동으로 주최한 4.19위령예술제가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노래, 가야금, 병방, 무용, 연극, 시낭송 등이 공연되었는데 내가 대구 시내 전 대학생 대표로 위령조문시를 낭독했다.
대학을 입학한지 한 달이 지난 4월 초순 <12인회>회가 결성되었다. 주로 인문사회학부와 대의원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었다. 국문학과 송문현, 장윤익, 영문학과 김재우, 행정학과 박노천, 박영수, 안유호, 법학과 김종호, 박승진, 송기석, 배철웅, 임국상, 김세곤, 그리고 조금 후에 약간의 개편이 있으면서 박노항과 대구대학의 손동수가 들어왔다.
<12인회>는 그 다음해인 1학년이 새로 들어오면서 제2 <12인회>, 그 다음해에는 제3 <12인회>로 늘어가면서 대학 내의 큰 세력으로 자라갔다. 안유호와 김종옥이 2대에 걸쳐 총학생회 회장으로 당선된 것은 <12인회>의 조직이 매우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가 된다.
<12인회> 친구들은 자주 만나서 많은 토론을 하였고, 인간적으로도 서로가 깊이 신뢰했다. 무주구천동에서 거행하는 김종옥 회원의 결혼식에 12명 전원이 검은 양복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가자 시골사람들이 무슨 연예인단이 온줄 알고 구경꾼이 시골장날처럼 모여들어 진풍경을 보이기도 했다.
군인들과 주먹싸움이 붙어 부대까지 쳐들어가기도 하고, 화원 유원지에서 불량배 10여명과 집단 패싸움을 하는 등 다들 기개가 대단한 친구들이었다.
이러한 기상들이 우리 회원 두 사람을 청구대학 총학생회장으로 당선시킨 것이다. <12인회>의 대부분 회원들은 지금도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입학한 지 두 달 후 우리 클래스 학생들은 서로 사이가 가까워져서 야유회를 가지기로 하고 의견이 모아졌다.
5월 말경 수성못에서 모임을 가지고 노래자랑, 장끼자랑, 보물찾기 등 행사를 다채롭게 했다. 추진위원장은 내가 하고 사회는 KBS대구 방송국 아나운서인 이일우 학생이 맡았다.
그날 노래자랑 1등상은 경산의 어느 초등학교 교사인 황정애 선생이 받았는데, 지금 기억에 매우 수준 높은 노래를 부른 것 같았다. 참석한 80여명의 학생들도 행사에 매우 만족해하고, 이런 모임을 다시 한 번 갖자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 야유회를 계기로 우리 클래스 학생들은 <녹향음악실>과 <하이마트음악실>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던 다음 해 1946년 7월경 음악을 애호하는 이창수 씨가 향촌동에 <녹향음악실>을 열었다.
좌.우익 갈등의 와중에서도 이 음악실은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6.25전쟁의 참화가 가라앉을 무렵에는 대구 문화인들의 아지트로 이용한 문화교류의 자리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를 거치면서 음악가 이기홍, 이점희, 안종배, 추병기, 시인 신동집, 화가 강우문, 배정탁 등이 출입했고, 추병기, 아종배 선생은 <녹향음악실>에서 조최하는 레코드콘서트에서 음악해설을 담당하여 대구의 음악교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