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백인 교수를 찾아가니 6시간을 이미 시간표에 넣어두고 “시간이 더 필요하냐?”고 묻기에 ‘충분하다’는 말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때부터 대학의 전임이 될 때까지 나는 명지대학 국문학과 강의를 계속했다.
새학기의 보직과 담임발표를 하기 직전 교장선생은 나를 불러서 1학년 학년주임을 맡아달라고 해서 나는 그 직책을 성의를 다해서 수행했다. 다음해는 2학년 학년주임으로 1반을 맡았는데, 나의 반에는 시인 김종삼 씨의 딸인 혜경이가 반의 총무를 맡았고, 반장은 당시 문교부 학무과장의 딸인 장혜경이 선출되었다.
둘 다 착실한 모범생이고 장혜경은 반에서 1등을 하는 우등생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와 장병규 과장과는 줄곧 친교가 계속되었다.
명지여고 졸업생을 문교부에 촉탁으로 취직시키고 명지여고 성시훈 수학선생을 대입학력고사 출제위원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일은 모두 장병규 학무과장이 나와 명지여고에 배려한 일이었다. 장병규 학무과장은 그 후 문교부 대학정책실장, 차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사장, 중부대학교 총장까지 지낸 매우 유능한 관료인 동시에 교육행정가였다.
반장 장혜경은 마음이 넓고 봉사정신이 강한 학생이었다. 총무 김혜경이 공납급 내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남모르게 도와주기도 하고, 학생들이 2학년 수학여행을 갈 때 김혜경 학생이 수학여행비를 내지 못하자 나는 반장인 장혜경을 불러서 “내가 수학여행비 반을 내줄테니 너도 집에 가서 의논해서 반을 보태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튿날 반장이 와서 “아버지께서 전액을 다 내시겠다고 하니 선생님께서는 안내셔도 되고, 혹시 혜경이가 자존심이 상할지 모르니 제가 냈다는 말씀은 마시고 선생님이 내신 것으로 해주세요.” 하고 말했다.
나는 장혜경의 마음 씀씀이를 보고 ‘애가 고2 학생인가?’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래서 나는 문교부가 주관하는 ‘전국 모범학생 상’ 중 장혜경을 <봉사상>에 추천하여 이것이 서울시교육위원회의 예선통과를 거쳐 전국에서 한명이 받는 <봉사상>에 선발되었다.
당시 이상을 받는 학생들은 장관의 특명에 의하여 대학입시제도 프리미엄을 받게 된다고 했다, 시상식은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에서 전국 시ㆍ도교육감과 수상 대상이 된 각급 학교의 교장, 담임, 학부형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장혜경은 나중에 의사가 되어 병원을 경영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출신이면서 서울대학교 출신들로부터 다소 소외되어 있었던 김병욱 선생이 매우 우수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2학년 학5생들이 수학여행을 할 때 회계를 맡도록 했다.
회계를 책임감 있게 잘 처리하고 인간미도 풍부하여 나는 당시 한성대학 학장 직무대리를 하고 있는 정연길 교수에게 김병욱 선생의 강사 시간을 부탁했다.
1978년 12월 하순 어느 날 나는 문교부 대학행정과 김하준 계장을 찾아갔다. 퇴근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 때문에 김하준은 한 시간 후 정부청사의 근처의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 시간에 식당에 가니, 김하준이 다른 한 사람과 같이 들어왔다. 인사를 시키는데 ‘청주사대 학장이며, 돌아가신 청주사대 설립자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명함을 보니 강인호(康仁鎬)학장으로 되어 있었다.
그 당시 전국에서 종합대학교는 몇 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다수의 대학이 학장으로 되어 있었다. 김하준은 나의 이력을 소개하고 “청주사대에 자리가 있으면 선처해달라”고 부탁했다. 강인호 학장과 김하준은 가깝게 지내고 있는 사이로 보였다.
강인호 학장은 “우리 학교의 전임 채용 내규에는 반드시 청주사대에 일 년 이상 강사 경력이 있어야 전임교수로 채용될 수 있기 때문에 다음해에는 전임강사 채용이 어려우니 내년 일 년동안 우리 학교에 강사로 나오고 그 다음해에 채용이 가능하겠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강 학장과 인연이 맺어져서 청주사대의 여러 가지 회사 일에 상담역이 되기도 했다.
청주사대와 명지대학, 서울신학대학에 강사 시간이 짜여져서 나는 교장 선생께 사정을 말하고 신학기에 담임을 맡지 않았다. 다른 선생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18시간만 수업하고, 나머지는 명지대학, 청주사대, 서울신학대학에 출강했다. 고등학교 교사로서는 정말 특혜를 받은 배려에 대해서 지금도 이대영 교장 선생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명지여고의 수업과 대학 강의로 일 년을 매우 바쁘게 지내는 가운데 강인호 학장과는 매우 친해져서, 강 학장은 나의 전임문제를 고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명지여고 교장이 바뀌어서 이대영 교장이 명지대학 재단이 흡수한 국제대학 학장으로 가시고 명지대학 국문학과 교수이시며 도서관장을 맡으셨던 이상보 박사가 명지여고 교장으로 오셨다. 이상보 교장선생은 박사학위 과정에 있는 나의 지도교수였다.
거리의 확성기에서 <징글벨>과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울리는 12월 어느 날이었다. 이응호 교수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이응호 교수의 용건은 재단이사장 비서실장의 책상 위에 나의 이력서가 있는 것을 보고, “왜 장윤익 선생의 이력서가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 비서실장은 “이 사장님으로부터 이 분에 대해서 이응호, 이상보 교수에게 인적사항을 알아보고 두 분이 추천한다고 해서 재단이사장 채용건의서를 붙여 학장에게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나를 ‘만나자’고 하신 것이다.
내 자신도 일이 이렇게 급박하게 되어 가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며칠 후 이응호 교수와 이상보 명지여고 교장선생은 “장윤익은 벌써 전임이 되어야 할 유능한 학자인데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는 의견을 붙인 나의 이력서가 박일경 명지대학장에게 넘어갔다. 박일경 학장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분이다.
나는 후배인 대구사범 병성중학교 출신 엄 비서를 만나 지금의 상황을 알려주고 학장을 만난 후 일이 잘 처리되어, 나의 이력서는 교무처장을 거쳐 학과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학과 교수들은 작년에 한번 논의된 관동대학 H교수보다는 장윤익 선생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여서 나의 인사서류는 다시 교무처를 거쳐서 이사장까지 결제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때 관동대학 H교수의 동향이며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던 Y교무과장이 H교수에게 연락하여 H교수가 급히 서울로 올라와서 이사장을 개별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H교수는 이사장과 같은 고향인 부여사람이며, 이사장 아들의 가정교사를 한 적이 있어서 이사장과는 특수한 친분을 가진 사이였다.
H교수는 자신이 관동대학에서 교무처장까지 하면서 7년이나 고생했는데, 장윤익이 명지대학에 전임으로 채용되면 자기는 영영 명지대학에 오기 어려워지는데, 장윤익을 관동대학에 보내고 자기를 명지대학으로 오게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는 호소와 항변으로 결국 H교수와 내가 마지막 순간에 바꾸어지고 말았다. H교수의 호소가 이사장의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친구 김하준과 이응호, 이상보, 이대영 교수 등 여러분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명지대학의 교수 인사발령은 수포로 돌아가고 나는 관동대학의 전임강사로 내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