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 특히 의과대학 교수는 정치적 사건으로 직간접적으로 말려들어갈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나의 경우는 별로 그렇지가 않았다. 병원이 서울역 앞에 있을 때 4.19가 터졌다. 응급실에 수십 명의 학생이 부상을 입고 몰려들어왔다. 순식간에 응급실은 야전병원과 같이 되고 말았다.
나는 종일 그곳에서 젊은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흉부에 총상을 입은 20세 미만의 어린 학생이 내 손을 잡고, “선생님, 이것이 죽는다는 거지요.”하면서 어머니에게 빨리 연락해달라고 간청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정치가 무엇이고 권력이 무엇이기에 젊고 순진한 학생들의 희생을 강요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전체 교수회의와 행진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응급실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캐나다에서 선교의사로 온 마취과의 럽(Robb) 박사의 헌신적인 활동이다. 온몸에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젊은 생명을 구하고자 초인간적인 노력을 하는데 대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후에도 의사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럽 박사를 볼 때 마다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게 되었다.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그 후 정치인들의 사리사욕의 추태로 인해 올바르게 뜻을 이루지 못했음은 안타까운 아쉬운 일이다. 또 4.19가 끝나고 세상이 바뀐 뒤로는 부상한 일부 학생과 일반인들의 자세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저명한 정치인들이 저마다 다투어 하는 문병은 하나의 큰 행사가 되었고, 위문품과 꽃이 답지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부 부상자들의 태도가 날이 갈수록 오만해지고 의사와 간호사나 다른 환자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발생, 병원으로서는 큰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나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도육군병원 자문교수로서 주 1회 정도 육군병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4.19직후 내가 육군병원에 가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했다. 자살한 이기붕 씨 일가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강당에서 관에다 손을 얹고 묵묵히 서 있는 노대통령을 가까이 보면서 인생무상을 새삼 느꼈다. 도대체 정치와 권력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비극을 초래하는가 하는 의문이 끊기질 않았다.
5.16쿠데타가 발생했을 때에도 나는 비교적 일찍 이를 알게 되었다. 이른 새벽에 한강 쪽에서 총성이 들리기에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걸었더니 수명의 군인들이 경한 총상을 입고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군과 관련된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하고 라디오를 틀었더니 혁명공약 등이 방송되고 있었다.
수일 전부터 우리나라를 방문 중이던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의 저명한 신경외과 교수인 워커(Walker) 박사가 반도호텔에 유숙화고 있어서 즉각 전화를 걸었더니 용케 통화가 되기에 공산당이 아니고 군사쿠데타라고 이야기하고 안심하도록 했다. 워커 박사를 다음날 첫 비행기로 떠나게 하는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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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 시위 부상자들을 위문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출처 ; e영상역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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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이후에 자유당의 거물 정치인과 장관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그들이 병보석을 신청하면 사법부는 대학병원에 전문적인 감정을 의뢰했는데, 신경계통에 질환이 있는 사람은 내가 맡아서 진찰할 때가 많았다. 나는 정치적인 견해는 일체 배제하고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로서 공정하게 감정하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도장은 여러 번 찍어준 것 같은데, 감정료는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으니 법원의 행정 절자상의 실수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의사생활 중에서 가장 불쾌했던 일은 검찰에 참고인으로 출두하는 일이다. 상해나 교통사고 환자 관계로 검사실에서 전문 참고인 조서를 작성할 때에는 참으로 앉아 있기가 고통스러웠다. 국민의 의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들이 보면 마치 피의자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검사실에서 참고인 조서를 작성한 후 도장을 찍기 전에 읽어보았더니, 질문은 “그런가”로 표현되어 있는데, 대답하는 쪽은 “그렇습니다.”라고 경어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는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고 모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날인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일이 있었다.
다행이 이를 잘 이해하는 검사가 나의 주장을 받아주었지만, 다시 문서를 작성해야 했던 서기에게는 미안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런 관존민비적인 관례가 검찰 내부에서 시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가 각자의 입장에서 민주화에 노력하면 우리나라도 민주주의의 생활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나는 조선일보에 미니 칼럼을 쓰면서 군.관.민(軍官民)이라는 용어를 없애자는 주장도 했다. 이는 일제 때의 대단한 잘못된 풍습이 그대로 이어진 것인데, 아직도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서야 겨우 민.관으로 순서가 바뀌어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사회의 잘못된 관습은 고쳐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았다.
법정에서도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다. 판사가 입정하면 전원 기립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당연한 관습으로 되어 있다. 나는 법정 앞줄에 앉아 있다가 지루해지면 다리를 꼴 때가 있었는데, 이때 법정의 경위로부터 주의를 받게 된다. 그래서 자세히 봤더니 변호사도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기에 그쪽을 보라고 손짓했더니 별말 없이 넘어갔다.
사실 외국에서는 다리를 꼬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들은 적이 없었다. 훗날 12대 국회에서 어떤 국영기업체의 이사장이 다리 위치 때문에 자세가 오만하다고 국회의원들로부터 지적을 받고 봉변을 당한 일이 있는데, 내 개인의 의견으로는 이런 것은 개개인의 양식이나 습관에 맡기는 것이 옳고, 만약 꼭 문제시하려면 규칙으로 명문화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생각된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데 예절도 알맞게 고쳐냐가야지 않겠는가?
내가 살아온 시대가 변화가 많은 과도기였다고 볼 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권력에 의한 압박감, 이치에 맞지 않아도 참아야 했던 일들이 가슴속에 스트레스로 남게 되고, 말 못할 고통을 받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다음 세대에는 정말로 생활 속의 민주화의 합리화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