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파병 위문공연단 (11화)
  제2장 무대 뒤의 숨은 그림자1

나는 많은 예술인들과 만나면서, 그들과의 벽을 없애려면 공무원으로서의 권위 같은 것은 과감하게 휴지통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때만이 호흡이 통하는 법이다. 즉,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인간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지, 상하관계로는 사무적인 관계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공무원 생활을 하던 초창기만하더라도 공무원 사회에서 권위 같은 것을 무슨 계급장처럼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일반 사회에도 팽배해 있었다.

또한 ‘연예인’이라면 자신의 발아래 놓고 보려고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명 ‘딴따라’라고 부르며 가볍게 대하는 것이 그 시절의 풍조였다. 자녀들이 연예인이 되겠다고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펄쩍 뛰던 부모들의 모습도 그런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그 시절 내가 공연예술 담당 공무원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술인들과 긴밀하게 지내다보니 자연적으로 그들의 내면세계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랬기에 그들에 대한 편견이 없었던 것이다.

나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어느날은 뜻하지 않게 아내에게 무안을 당한 적도 있었다. 연예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아내는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유교적인 정서가 몸에 배어 있었다.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장인어른(김정수)이 서울대학 교수였고, 큰처남(김영렬)은 서울대 공대 화공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특히 큰 처남은 공학박사, 경영학박사, 법률학박사 등 3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국제변호사 자격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큰 처남댁(최동주)은 육당 최남선의 장남 최한인 박사의 딸이다.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연예인들과 자주 어울려 다니는 것이 조금 눈에 거슬렸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인지도 몰랐다.

1969년 일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월남파병 직후 연예인들을 이끌고 위문공연을 갔다. 단장은 소설가 최정희 여사였고, 박동은(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씨, 김형덕(김후란 서울신문 문화부 차장) 씨, 이영희(한국일보 문화부 차장) 씨 등은 종군기자로 참여하였다. 나는 백금녀, 이종철, 김세레나 등 연예인들을 포함한 위문공연단 20여명을 인솔하는 책임자로 따라가게 되었다.

우리 위문공연단은 월남파병 장병들의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특히 당시 장병들에게 김세레나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녀가 무대에 올라가기만 하면 휘파람을 불며 환호의 소리가 요란하였다.

당시 김세레나가 즐겨 불렀던 ‘갑돌이와 갑순이’는 파월장병들을 황홀하게 만들었으며, 그 노래는 나중에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어 그녀의 가수로서의 인기가 최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위문단이 월남공연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당시 대중잡지로 알려져 있던 <아리랑> 잡지에 월남파병 위문공연단 기사가 현지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실렸다. 연예인들과 함께 찍은 내 사진도 기사 속에 보였다.
 
▲ 1969년 월남 위문공연 취재 차 종군작가들과 함께 / 왼쪽부터 당시 이덕 문공부 사진기자, 김후란 서울신문 문화부차장, 최정희 소설가, 박동은 동아일보 문화부차장, 이영희 한국일보 문화부차장, 필자

나는 내 사진이 나온 <아리랑> 잡지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내에게 보여주며 자랑을 하였더니 내 예상과 달리 사뭇 냉담한 표정이었다.

“공무원이 권위를 지켜야지 연예인들과 어울려 사진이나 찍고......”

아내는 참 한심하다는 투로 나를 쳐다보더니, 내가 내민 <아리랑> 잡지를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으로 툭 쳐서 멀리 밀어버렸다.

“아니, 연예인이 어때서?”

나는 자주 연예인들과 어울려 다녔기 때문에 조금도 그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딴따라‘라고 해서 연예인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다.

도대체 공무원의 권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연예인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해서 격이 떨어진다니? 공무원이나 연예인이나 다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연예인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인기인이다.

나는 한동안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연예인을 경시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요즘은 연예인이 최고의 직업이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인기 직종이지만 1960~197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좀 서운한 마음이 있었지만 아내의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직책상 연예인들과 어울리는 일이 있더라도 공무원으로서 행동을 조심하고, 권위를 지켜달라는 무언의 부탁임을 알고, 그 후 매사 행동에 조심하고 공무원으로서 권위를 해치는 일은 삼가게 되었다.

한편 월남파병 위문공연단 단장을 지낸 최정희 여사와 나는 그 이후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단장으로 있을 때 내가 인솔 책임자로서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최정희 여사는 당시 홍종철 문화공보부장관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 이종덕을 과장 안 시켜 주는 거예요? 위문공연단 이끌고 월남에 갔을 때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

당시 내 직급은 행정주사였다. 최정희 여사는 위문공연단 중 연예인들은 대부분 감사패를 받았는데, 실무 책임자인 나에게는 아무 표창도 주어지지 않자 단장으로서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보양이다.

나중에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최정희 여사가 문화공보부장관에게 나의 과장 진급을 추천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이 이루어 질수 없는 사안인 줄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주 고맙게 생각하였다. 나를 그만큼 생각해주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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