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액운 (43회)

84년 고역의 봄과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어 10월 12일에 또 사건이 일어났다.

아침에 학교에 출근하여 1시간 정도 지나서 집에서 전화가 왔다. 전기회사에서 검침원이 와서 전기계량기가 이상하다니 집에 와보란다. 급하게 집에 가서 보니 정말 현관 안 위에 있는 계량기의 봉인이 떨어져 있고 계량기가 돌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장 그대로 적은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 하여 무심코 도장을 찍었다.

다음날 전기회사에 출두하였더니 누가 그렇게 하였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더니 집안에 있는 계량기를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고 누가 했다는 것이냐고 하는 것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계량기가 집밖에 있었다면 어떤 핑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현관 안에 있으니 꼼짝없는 일이다.

또 도장을 찍으라는데 그곳에 도장을 찍으면 이것은 특수범죄에 속하므로 전기회사에서도 의무적으로 경찰에 고발을 해야 하고 고발을 당하게 되면 경찰이 수사를 하게 되는데 범죄자가 실제로 저지른 범행을 현장에서 재현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도장을 찍는 것을 미루고 전부터 알고 지내던 전기회사 직원과 상의하였더니 정말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손을 댄 일이 없었으므로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더니 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이 맞서보란다. 맞서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물으니 경찰서와 검찰청에 가서 한 일이 없다고 잡아떼며 맞선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았다. 결국 그러면 고발을 당하게 될 것이고 수사가 시작되면 경찰이 집안에 왔다갔다 할 것이고 경찰과 검찰에 몇 번이고 출두해야 하는데, 교통사고를 당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인지라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밤에 잠이 올 리 없다. 귀신 곡할 노릇이다. 내 집안에 있는 것이 나밖에 그런 것을 만질 사람이 없는데 일절 손댄 일이 없으니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얼핏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약 2주일 전 학교에서 퇴근하여 집에 있는데, 집에 밥을 해주는 아주머니가 앞집에서 전기의 전압을 올리는 승압공사를 하고 있으니 누구라도 신청만 하면 공사를 해주기 마련인데, 200볼트로 전압을 올리면 전기도 절약되고 좋다고 하였다.

나는 옆집에 가서 전공을 불러왔다. 그는 인입선이 어디 있느냐? 전기 계량기는 어디 있느냐? 등을 물러와 현관 위를 가리키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 일이 있었다. 그때 하는 말이 그 다음날 공사를 하러 또 오겠다고 하고 간 다음 이때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아마 그 사람이 틀림없이 했을 것이라 짐작이 갔다. 아마 그 전공은 그 다음날 공사할 생각으로 계량기 뚜껑을 떼어놓고 갔을 것이다.

다음날 수소문 하여 그 전공을 불러보았으나 그 자는 계량기를 보기만 했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손을 댔더라도 자기가 했다고 할 리가 없다. 만일 이것이 그 사람이 한 것으로 판명이 나면 그 사람이 속한 전기공사업체는 크게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맞선다 해도 경찰서에서 그 전공을 불러다 네가 했느냐고 하면 틀림없이 오리발을 내밀 것이고, 그리고 전기청부업자도 기름을 칠 것이지 가만히 있겠느냐, 그러니 나중의 판결방향은 분명하지 않은가.

안되겠다, 금년이 아홉수가 아닌가! 누가 이야기 하였듯이 운이 나쁘면 모든 일이 꼬이기 마련인데 이 불운의 해에 일을 벌여 무슨 득이 있겠는가. 그저 금년에는 살살 숨죽여 살아가자. 전기회사에 가서 벌금을 얼마든지 낼 터인즉, 제발 고발만은 안 되게 해달라고 손발 다해 빌었다. 그리하여 상당한 벌금을 물면서 치사하게 끝마무리를 짓고 말았다.

▲ 둘째딸 대한민국 가을 미술대전 대상작 전시회 (1985. 9.16.)

천지만물을 관장하는 신이시여! 이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니오니까! 아무리 아홉수의 해라고는 하나 봄의 교통사고 하나로 끝낼 것이지, 무엇이 부족하여 또 억울한 이와 같은 시련을 주시니 조물주나 신도 이때만은 인정도 눈물도 씨가 말라붙어 버린 모양이다.

대학교수인 필자로도 이런 일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찍소리 못하게 되었으니 이 천지에 이것보다 더 억울하게 당하는 힘없는 백성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아니다. 이러한 불행한 일은 내 자신이 과거에 이루어 놓은 업이 쌓여 일어난 것일 게다. 모든 것이 내 탓일 게다. 내 탓, 내 탓.

O O O

이 마의 1984년이 가고 85년이 되었다. 2월 14일에 막내딸 정호가 수원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2월 15일에는 셋째딸인 영호가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응용미술과를 졸업하였다.

학교 강의는 예년과 같고 우리 내외는 8월 7일에 목포에 가서 다음날 홍도를 구경하고 8월 9일에 집에 돌아왔다.

둘째 딸이 동양화로 대상을 타다

85년 9월 15일 밤이었다. 서울에 가있던 둘째딸 순호가 집에 왔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내 앞에 앉은 딸이 두 다리를 앞으로 쭉 펴고 있었다. 어른 앞에서 발을 내놓는다고 주위를 주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무심코 받아보니 대한민국 가을 미술대전 심사장인 덕수궁인데 김순호 양이 낸 그림이 대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딸의 건강이 좋지 않아 포기할까 하다가 겨우 그린 그림을 딸의 친구가 가을미술대전에 마감시간을 넘기고 약간 늦게 접수시켰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으나 이것이 상을 받을지는 꿈에도 생각을 못한 터라 너무나 뜻밖이라 약간 흥분한 끝에 그러면 대상보다 더 높은 상은 무엇인가하고 되물었더니 저쪽에서 깔깔대고 웃는 것이 아닌가. 하여튼 내일 그곳으로 나오란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어 웃는구나. 다음날부터 신문 TV등이 야단이다. 근래에는 가을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타도 매스컴에서 별것 아닌 것으로 보도하였는데, 그때는 왜 이리 야단이었는지 신문기자가 집에 찾아오는가 하면 TV에 나가 인터뷰도 하고 딸도 약 열흘간을 정신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하여튼 이화여자대학 대학원 학생으로 수상하였느니, 이때까지의 수상자 중 최연소라는 등 갖다 붙이기도 잘 하였다. 이리하여 약 한 달 동안은 우리 집에 좋은 일로 홍역을 치루였다.

딸은 예술진흥원에서 탄 상금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그 대상 그림은 예술진흥원에서 영구히 보관한다고 한다.